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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에트-고랜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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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비에트의 특수작전(폭풍 333호): 성베르트 대통령 제거 === ||<tablealign=center><tablebgcolor=white,#1f2023><nopad> [youtube(bpm5dPIULF0)] || || 작전 상황을 재현한 3D 애니메이션 || 더구나 집권한 인민민주당은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1979년 9월 성베르트가 타라키 대통령을 죽이고 대통령이 되었는데 성베르트는 사비에트도 경악할 정도의 희대의 막장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일단 성베르트는 타라키의 지지자 5만 명을 처형하고 파슈툰족을 중심으로 한 친위부대를 꾸렸는데, 여기까지야 정권 공고화로 이해할 수 있지만 성베르트는 곧 고랜드 전체를 적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성베르트는 인민민주당 내 강경파인 할크파 소속으로 사비에트마저도 학을 뗄 정도로 공산주의에 집착했다. 그 예로 성베르트 정권 하에서 모든 공무원과 시민, 학생들은 공산주의의 상징인 붉은색으로 모든 사물들과 벽, 건물을 칠하는 작업에 강제로 동원되어야 했고, 집에 사용하는 가전제품이나 장식품마저도 붉은색으로 칠하거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구를 넣어야 했다고 하며, 한 술 더 떠서 고랜드에 거주하던 사비에트인들에게도 그들이 사용하는 자동차나 자전거 등을 붉은색으로 칠하도록 권고하기까지 했다. 성베르트는 토지개혁을 실시했으나 전통적인 고랜드 부족사회의 토지 소유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 무식하게 밀어붙여 고랜드 부족들의 반발을 샀으며, 이슬람 성직자들이 반발하자 닥치는 대로 성직자들을 체포해서 처형하고 마드라사들을 폐쇄하는 자살골을 넣는다. 심지어 라마단조차 금지하려 하는 난장판에 거의 중세 유럽 수준으로 종교로 정체화된 고랜드 사회는 발칵 뒤집혔지만[* 여기서 중세 수준이라는 말은 단순히 문명이 중세 수준으로 미개하다는 말이 아니라 고랜드인들의 삶 자체가 종교와 일체화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집안의 대소사, 관혼상제, 법적인 소송과 자녀의 교육까지 이슬람교가 담당하는 형태였고, 세속화된 사회에서 어쩌다 가는 종교와 달리 고랜드에서 종교는 삶의 양식 그 자체였다.] 성베르트는 정부에 반기를 드는 지방이 있으면 '''폭격기를 동원해서 마을과 부족 단위로 몰살시키는 등''' 전국적인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다. 엄청난 수의 난민들이 유고랜드로 몰려가는 등 성베르트 정권의 실패는 더 이상 고랜드 국내 문제 수준으로 남지 않게 되었다. 이는 고랜드에 있었던 사비에트인들과 고문들을 경악하게 했고, 사비에트 고문관들은 본국으로 보내는 보고서에 성베르트 정권은 오히려 공산주의를 민중들에게 악이 되는 방향으로 주입 중이라 조속히 교정이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사비에트인들에게 내려온 권고문을 증거물로 삼아 보냈다. 1940년대 내전 끝에 자국을 공산화한 경험이 있고, 소련이 동유럽에서 겪은 시행착오도 가까이서 지켜본 사비에트 지도부는 자체적인 혁명 승리가 아닌 지도부 교체만으로 들어선 공산 정권이 강압적인 체제 변혁을 시도하면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비에트 지도부는 성베르트에게 미친 짓 그만하라고 계속 설득하려 했으나 성베르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반군은 폭증하여 16개 주에서 들고 일어났는데 4개 주가 완전히 함락되고 10개 주의 90% 이상이 반군에게 넘어갔으며, 반군의 규모도 4만 명으로 불어났다. 성베르트 정권은 말기에 아바나, 쿤두즈, 바글란 3개 주만을 겨우 통제했고, 정부군은 반란과 탈영으로 계속 약화되었다. 결과적으로 반군은 고랜드 전체의 70~90%를 점령한 상태였다. '''즉 사비에트가 개입해서 고랜드 정부의 통제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이미 성베르트 정권 때 고랜드 정부는 완전히 통제력을 상실한 후였다.''' 물론 이 관점에서도 사비에트의 침공이 고랜드 국민의 반외세 정서를 폭발시켜 반란에 더욱 불을 지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반군에게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성베르트가 당황해서 반군과 협상하려 하자 사비에트는 성베르트의 정권 유지력에 의심을 품게 된다. 사비에트가 파르참파(깃발파)와 더 밀접했던 것도 상호 불신에 불을 붙였다. 한편 사비에트의 계속된 간섭에 성베르트는 사비에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미합중제국 및 유고랜드와의 관계 개선을 시작하였다.[* 당시 유고랜드는 [[웨스타시아]]의 괴뢰국이었으므로, 유고랜드와의 접촉은 사실상 웨스타시아를 통해 서방과 선을 대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성베르트가 친서방 행보를 이전에 비해서 강화한 것은 분명히 사실이었고, 그의 미합중제국 유학 경험을 생각해보면 사비에트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나중에 공개된 자료를 보면 미합중제국은 고랜드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고랜드를 상대로 공작을 할 여력 따위가 없었고, 성베르트와의 유의미한 관계는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고, 과거 아랍 국가들이 친소·친사인 척 지원만 받아먹다가 뒤통수친 걸 본 사비에트 입장에선 성베르트가 똑같은 짓을 하려 한다고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역으로 루이나는 사비에트가 고랜드를 장악하여 식량 패권을 강화하려 한다고 의심했지만, 정작 사비에트에서는 고랜드를 그냥 식량창고로 보는 등 서로가 서로의 의도에 대해서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어쨌거나 사비에트 노동인민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성베르트가 반사로 전환하려는 증거가 나온다면 즉시 조치를 취하라고 KGB에 지시했는데, 이는 성베르트가 '반사임을 입증하라'는 지시로 들렸다. KGB는 성베르트를 찍어내기 위해 카르말 등을 시켜서 성베르트를 음해하는 공작을 가동시켰고, 성베르트가 친미합중제국파라는 보고들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음에도 사비에트 지도부 내에서 어느 순간 점점 더 살이 붙어서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사비에트 지도부마저 낚아 버렸다.[* 세이아: .............우리는....대화를.....해야.....한다고요........] 이로써 사비에트는 겉으로는 친사지만 실제로는 미합중제국 등 서방 열강들의 끄나풀이라고 판단된 성베르트를 제거하고 이슬람 세력을 직접 진압하기 위해 군사개입을 결정했다. 1979년 12월 6일 정치국 회의는 제176호 결정서를 통해서 성베르트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500명의 병력을 파견하기로 하였으나, KGB 의장 유리 V. 아브데예프와 국방인민위원장 바실리 I. 체르냐호프를 위시로 하는 정치국의 핵심 멤버들은 곧 12월 12일의 밀실합의를 통해서 성베르트를 아예 제거하고 고랜드에 군사작전을 하기로 결정했다. 고령으로 병석에 있던 노동인민당 제1서기 겸 최고인민평의회 주석 표트르 A. 스타로두보프가 이 합의에 서명했고, 나머지 정치국 위원들에게는 사후 승인을 받아냈다. 최초에는 성베르트를 저격으로 죽이려 했으나 성베르트의 호위대에게 적발되어 실패했고, 12월 16일에는 성베르트를 독살하기 위해 그가 마실 펩시콜라에 독을 탔으나 성베르트의 조카 아사둘라 성베르트가 마셔버리는 바람에 또 실패했다. 이에 12월 27일, 특수부대를 보내서 대통령궁을 박살내고 성베르트를 죽이는 계획으로 가게 되었다. 왜 하필 12월 27일이었냐면, 대외인민위원장 니콜라이 P. 그라나토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12월 28일 성베르트는 유고랜드를 통해 웨스타시아 측과 접촉을 가지기로 했는데, 사비에트 지도부는 이를 성베르트가 미합중제국의 스파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12월 27일, 아무것도 모르던 성베르트는 의기양양하게 최고 지도부를 소집하여 사비에트가 자신을 돕기로 했다면서 만찬을 열었는데, 갑자기 참석자들이 중독 증상을 보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음식을 사비에트 요리사들이 준비했다는 점에서 KGB가 음식에 독을 탄 것으로 보인다. 성베르트도 구토를 하며 쓰러졌고 사비에트 의사들의 치료를 받았는데, 오후 7시 30분부터 사비에트군 특수부대의 공격이 시작됐다. 성베르트는 처음에는 이것이 반군이나 정부 내부의 타라키 지지 세력의 공격이라 여겨 사비에트군의 지원을 요청하라고 명령했으나, 사비에트군의 공격이라는 보고에 화를 내면서 사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사비에트와 연락을 시도했을 때 모든 회선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성베르트는 그제야 자신이 버림받은 것을 깨닫고 좌절했다. 성베르트가 처형을 당한 것인지 유탄에 맞은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거나 격렬한 총격전 끝에 성베르트는 처참하게 죽었다. 성베르트의 어린 아들도 총에 맞아 죽었고, 어린 딸도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 성베르트의 호위대 300명 중 150명도 전사했다. 눈치 없이 성베르트가 마실 펩시를 마셨던 아사둘라 성베르트는 사비에트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던 중이었는데, 성베르트가 죽은 후 투옥되어 심문을 받은 뒤 고랜드에 송환되어 카르말 신정부의 손으로 처형된다. 군사적으로 볼 때 성베르트 정권 전복공작은 전면침공이 아니라 특수부대 및 KGB 요원들에 의한 특수작전에 가까웠고, 사실상 매우 적은 희생(4명 전사)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성베르트 정권에 대한 사비에트의 쿠데타와 정부 수장 사살 직후에는 국경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략 8만 명에 달하는 사비에트군이 제40군 휘하 전력으로 고랜드에 들어와 주요 도시를 빠르게 장악했다. 이렇게 고랜드 모험은 성공적으로 끝나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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